나의 책꽂이(인천일보 2003.12.27자 7면)
박 경 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행정학박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어령 저
원고청탁을 받고 바쁜 연구 일정 때문에 느긋한 독서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요즘의 일상을 아프게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실상 손 때 묻은 나의 책들과 고르고 따스한 소통을 자주하지 못해 늘 마음 한 구석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우선 연구과업을 수행하려다 보니 각 과업과 관련된 문헌에 대한 집중적인 편식과 속독의 습성이 배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절반 정도의 학술도서는 그나마 연구실로 옮길 수 있었지만 방 3개의 작은 아파트 공간의 한계로 커 가는 두 아이에게 서재를 빼앗기고 결국 책꽂이가 안방과 거실, 베란다까지 차지해 아내와 아이들의 눈총을 받게까지 하였으니 나의 책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매일 아침을 거르지 않는 나의 식탁 앞의 책장에 꽂아있는 교양 서적들은 내 눈길을 받으며 문득 문득 뽑혀 읽히거나 아련한 기억을 환기시키며 각성제 역할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이 고교 2학년이던 1976년이었으니 벌써 27년 지기가 되었다. 그 때 다행스럽게 저자와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문화의 단면들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보며 발견의 놀라움과 감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 이후 작년에 다시 펴낸 ‘개정증보판- 그 후 40년’을 통해 이어령의 성숙해진 시각을 관찰할 수 있을 때까지 긴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책사랑의 진미가 아닐까 싶다.
한국문화 속 숨은 코드의 독창적 해석
한국인의 의식과 문화원형의 발견
이 책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할 쉽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양서라고 생각된다. 1962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에 주해를 달아 엮은 이 책은 당시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고 지금까지 250만부 이상의 스테디셀러로 이제 한국문화론의 고전이 되었다.
저자는 초판에서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 문화의 단면을 산업화의 상징인 지프차에서 내려다 본 이방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그는 시골길에서 지프차의 클랙슨 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지 못하고 마치 가축 같은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달아나던 노부부의 당혹스런 모습에서 천년을 그렇게 쫒기며 살아온 우리의 아픈 모습을 발견해 낸다.
이런 시각의 연장을 통해 “헬프 미”가 아닌 “사람 살려”란 외침 속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채 남에게 의지해 온 우리 자의식을 밝혀내고, 독립적인 운명을 나타내는 육면체의 ‘주사위’보다 윷가락이 얽히고 설키어야 비로서 의미를 형성하는 ‘윷놀이’에서 말을 잡아먹는 놀음은 곧 개인보다 파당의 연관된 운명을 만들어 내는 사화 당쟁의 압축도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한국인이 가까운 친지나 이웃에겐 우애와 정, 예의를 잘 갖추면서도 전혀 낯모르는 사람에게는 냉정하게 표변하는 공공 도덕의 부재 현상을 질타하기도 하고,
흰옷을 좋아하는 풍속 또한 기실 옷을 물들여 입을 만한 염료의 부족에서 생긴 것이라며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좋게 생각하려는 자기애와 순응의 표징으로 해석해 낸다. 또한 옛 조상들이 쓰고 다녔던 ‘갓’ 문화에서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를 읽고 한숨짓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늘 접해왔던 낯익은 것들 속에 숨은 의미를 캐내고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너무나도 친숙했고 무감각화한 한국문화의 얼굴을 냉정하게 때론 자학적으로 바라보도록 가이드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의 고백처럼 농경문화에서 산업화로 넘어가던 시기의 우리 문화의 슬픈 자화상에 대한 ‘피맺힌 상처를 핥고 있는 맹수의 분노’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40년이 지난 2002년 개정증보판에서 저자의 이런 시각은 좀더 따뜻한 애정과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근대화 과정에서 전래의 것들을 잃어가면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부딪히며 극심한 변화와 부적응의 양상을 보여왔던 한국적 정서와 문화가 오히려 디지털시대에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가능성을 읽는 것이다.
지프차에서 바라본 시점(視點)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열린 ‘정자’(亭子)에서 바라본 시점인 것이다. 360도로 열려있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이도록 만들어진 공간이 만들어내는 ‘정자형 문화’는 디지털시대 지식정보사회에서 소통과 네트워크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으로 바라볼 때, 탄식과 배고픔의 눈물은 ‘붉은 악마’가 보여준 참여의 눈물, 감동의 눈물로 바뀌게 되고, 보자기는 물건의 부피와 성질에 따라 달라지는 3차원의 다기능 용기로, 윷놀이의 문화는 정확한 계산에 의한 저급 소통이 아니라 우연성, 애매성, 융통성의 고급 소통의 자산이 된다.
또 유목생활을 많이 한 서양사람들이 실외스포츠에 강하다면 농경문화 속에 실내놀이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에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물 만난 고기처럼 당연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산업사회에서 불운을 겪었던 한국문화의 숨은 힘은 이제 지식정보사회로 문명의 특성과 환경이 변하면서 다시 한국의 시대를 만들어 내리라는 희망을 일깨워준다.
문화란 일종의 기호이다. 코드를 푸는 법을 제대로 알아야 그 의미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다. 문화의 세기에 우리 문화의 결을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거듭 펼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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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12-27 | view : 3980
